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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시대의 조선 중기 회화

조선 중기의 회화에 대해 알아봅시다

윤인걸 <거송관폭도> 비단에 담 16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근대와 함꼐 가장 어렵고 불안했던 시대였다. 7년간이나 끌었던 임진왜란, 왜란의 피해가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이어졌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등의 외적의 침입은 국토를 초토화하여 정치, 경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던 왜란과는 달리 두 번에 걸친 후금의 침입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굴욕을 안겨 주었다. 청과 어쩔 수 없이 군신지국의 관계를 맺어야 했고, 인조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항복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고 3학사를 내주어 참형되게 하는 등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해야만 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이관의 난이 일어났고, 사색당파간의 싸움이 격렬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전개되던 일련의 사건과 사태들은 조선 중기의 정치와 사회와 경제에 극심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 감안하면 이 시대에 문화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인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왜란과 호란을 겼는 동안 도공을 포함한 많은 예술인과 학자들이 인명을 잃거나 포로로 잡혀 갔고, 수많은 서적과 서화를 위시한 문화재가 산일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문화나 예술이 꽃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과는 달리 적어도 회화 분야에는 기적과도 같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이러한 업적을 남길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흔히들 예기하는 것처럼 민족적 끈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기대고 토대로 삼을 수 있었던 튼튼한 문화적 전통이 전대인 조선 초기에 확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실제로 이 시대에 발전된 회화의 배경에는 안견파 화풍이나 강희안이 수용했던 절파계화풍이 주를 이루었음을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밖의 화풍에서도 이러한 전통의 계승과 발전의 현상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대의 회화는 새로운 화풍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데에보다는 번대에 확립된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데에 보다 치중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의 회화는 매우 전통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에는 특히 산수화 분야에서는 한 화가가 한 가지 화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두세 종류의 화풍을 수용하여 그리는 경향이  강했었다고 생각된다. 김제, 이정근, 김명국, 이징 등의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안견파 화풍, 절파계 화풍 또는 미법 산수화풍 등을 넘나들었던 것은 이러한 풍조를 잘 말해 준다. 이것은 어찌보면 현대인들이 얘기하는 일종의 실험정신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한 가지 화풍이나 분야를 붙들고 천착했던 화가들도 역시 적지 않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이 보여주는, 보기에 따라서는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경향은 다같이 취할 점이 있으며, 현대를 사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잡는 데에 좋은 참고가 된다고 본다.

 

 이 시대에 또 한가지 주목되는 현상은 사대부 집안이나 화원집안 중에서 회화를 대를 이어 제작하고 즐기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두드러지기 시작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더욱 뚜렷해져서 후기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확고하게 자리잡힌 신분제의 영향 때문인지 화원 집안들끼리의 혼인이 자주 맺어져 집안들끼리 서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는 경향이 매우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추세는 조선 후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가법을 형성하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면서 당시의 회화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뭏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대의 화화는 비교적 전통성을 강하게 띠면서 어지럽던 시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뚜렷한 독자적 양식을 남겼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회화를 특히 애정어린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고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중기에 있어서의 안견파 화풍은 구도나 공간개념등에서 전대와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차이는 이 시대의 유명, 무명 화가들의 여러작품에서 간취되지만, 특히 이정근 이횽효 이징 김명국 등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안견파 화풍의 줄기찬 계승을 말해줌과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보여 준다. 형태는 약간씩 단순화되면서도 과장되면, 공간의 확산 못지 않게 깊이감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필법과 묵법도 전대에 비하여 대체로 부드러워져 같은시대의 절파계 화풍의 강한 필묵법과 좋은 대조를 보여 준다. 또한 이 시대의 안견파 화풍에는 당시에 유행한 절파계화풍의 영향이 시대가 내려올수록 약간씩 가미도는 경향을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