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부터 남종화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중기에 유행했던 명대의 절파 화풍이나 원체 화풍, 그리고 초기 이래의 안견파 화풍의 잔재 등이 모두 쇠퇴하여지면서 남종화풍의 본격적인 파급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는 원말의 사대가들을 위시해서 명대의 오파, 명말의 동기창, 청대의 정통파인 사왕,오,운등의 화풍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존의 작품들이나 화찬 등을 참조하면 그 중에서도 특히 황공망, 예찬, 심주, 문징명 등의 화풍이 애호를 받았고, 또 자주방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부터는 명대 후반의 동기창의 화풍이나 화론의 영향이 전해지고 또한 청대 후반기의 개성 있는 화가들의 화풍도 어느정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남종화라고 불리는 문인화풍은 북경을 다녀온 사행원과 화원들에 의해 전래된 진작이나 방작을 통해서 한국에 파급되었을 가능성도 유추되지만, 그보다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역시 고씨역대명이노하보와 개자원화전들을 비롯한 명,청대의 화보들이라 하겠다. 사실상 현재 유전하는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그러한 중국 화보들의 영햐야을 보여주고 있다.
남종화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은 대체로 18세기부터라고 믿어지고 있다. 중국의 경우 전형적인 남종화풍이 원대는 물론 명,청을 거치는 동안 꾸준히 지속되고 발전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의 남종화풍이 왜 원말이나 명초에 바로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는지에 관해 의문이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현단계에서는 확실한 단언을 하기가 힘들고 또 앞으로 추구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그 원인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침으로 인한 문호활동의 침체로 돌리거나 또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활내의 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아울러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 남종문인화와 문화의 요람이었던 소주, 항주, 오흥 등의 강남지방의 도시들과 한국과의 해상을 통한 직접적인 교섭이 남송 후반기 이래로 두절되었던 점이다 물론 명이 금릉에 도읍해 있던 14세기 후반에 조선과 강남 지방과의 교류가 얼마동안 있었기는 했지만, 명의 쇄국적 태도로 미루어 보아 남경 이외에 다시 미술의 중심지들과의 접촉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를 단행한 후로는 양자강 남쪽과의 교섭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이렇듯 명이 남경에 도읍했을 때를 제외하면, 한국은 중국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강남 지역과 원대 이래로 미술이나 문화상의 교류가 끊긴 상태였으며, 따라서 주로 북경의 궁정을 통한 미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을 통하여 보면 중국의 남종화는 늦어도 조선 중기의 17세기 초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중국 강남 지방의 중국 남종화가들의 작품들이 북경으로 전해져 그것이 다시 사행원들의 손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김상헌은 남종화풍이 가미된 명대 원파의 대표적 화가인 당인과 구영의 산수도 및 명대 오파의 대표적문인화가인 문징명의 그림에 대한 제찬을 그의 문집에 실었다. 특히 문징명의 그림은 최명길의 양자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1645년에 귀국한 최후량의 소장품으로, 제찬문이 다섯 수인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섯 폭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최후량이 소장하고 있던 이 문징명의 작품들은 뒤에 보듯이 미수 허목도 실견했던 것이다.
오파의 남종화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당시에는 그 파의 비조인 심주보다도 그의 제자였던 문징명이 먼저 알려졌던 듯하다. 그것은 김상헌의 기록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다음의 기록에 의해서도 느껴진다. 선조신록에 의하면 선조 33년 12우러에 우의정 김명원이 선조에게 문징명의 화첩을 상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김명원은 소신이 전날 상진한 문징명의 화첩은 중국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인데, 듣자오니 그 묵묘가 일세에 가장 뛰어났다 하므로 감히 거두어 사사로이 소장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또한 허목도 그의 문집인 기언에 실린 형산삼절첩발에서 정유년 여름에 최한경과 서화를 논하다가 그의 소장품 소겡서 꺼내 보여준 고화가 형산 문징명의 작품이었다는 것과 그보다 일찌기 천계 중에 고씨화보를 구해 처음으로 문징명의 필묘를 보게 되었었다고 적고 있다.
[발췌 : 동양의 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