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원 산경춘행도 <화첩 디잔에 담채, 대북 고궁박물원>
1. 동양화의 기법적 특수함을 이해해봅시다.
동양화에서는 필법과 묵법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양화는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선이라 할 수 있고, 이 선을 위주로 다루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필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선이야말로 포치 또는 구도를 잡는 데는 물론, 산이나 바위, 나무 등의 골격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도 기본이 된다. 그러므로 잘못 그어진 하나의 선도 용납될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유화로 고쳐 그릴 수 있는 서양화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옛날의 동양화가들은 단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좌정하여 머리 속에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완성한 후에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흉중구학이니 흉중성죽이니 하는 말들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선이 이처럼 동양화의 기본이기 때문에 선에 주어지는 강양, 비수, 농담의 변화가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겨렁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옛날의 대표적 작품들은 한결같이 살아 있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선은 기운생동하는 그림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작품에서 이것을 효율적으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동양화에 있어서 먹과 그 사용법 즉 묵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먹은 검으면서도 물과 결합하여 온갖 색감을 낸다. 이것이 먹의 오묘함이라하겠다. 이러한 먹의 오묘함은 먹을 아껴 쓰는 데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북송대의 이성은 이미 먹을 금처럼 아껴 '석묵여금'이라는 말까지 낳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묵법은 남송대의 마하파 화가들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묵법은 시종 중요했고 또 고도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묵법은 도양의 회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해왔고, 이것만으로도 특정한 시대의 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현대의 우리 회화에 있어서는 먹을 지나치게 헤프게 쓰고 또 과도하게 검게만 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먹을 아껴 쓰고 그 변화의 오묘함을 현대적으로 살리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2. 동양화의 전통성과 새로운 창작
일반적으로 동양화는 서양화에 비해 표현의 방법이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이제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앞에서 언급한 기법적 특수성과 함께 동양화가 지니고 있는 강한 전통성에 대한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상 동양회화는 서양화의 경우와는 달리 기법적인 특수성을 지니고 있고 또 전통성이 훨씬 강한 것도 사실이다.
전통은 유능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화가에게는 새로운 창작을 움트게 해주는 밑거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무능하고 게으른 화가에게는 전통은 거추장스럽고 새로운 창작에 방해가 되는 성가신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와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역사에 남은 대가나 명화는 전통의 소화 없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반면에, 전통에만 얽매여 그것을 탈피하지 못한 사람이 대가가 된적도 없다. 오직 전통을 철저히 소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것을 극복한 화가만이 새로운 화풍을 이루고 대가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성은 새로운 창작을 가능케 하는 밑거름임을 인식하고, 또 지금까지의 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항시 새로운 화풍이 형성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새로운 화풍의 창작이 가능하다고 하는점을 확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발췌 : 동양의 명화]
다음시간에는 한국 회화를 어떤 입장에서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